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왕씨 몰살 (문단 편집) == 결과 == 유력 왕씨를 죽이고, 죽이지 않은 왕씨도 조선 초기 수십년간 숨어살게 만든 숙청 작업의 결과, 고려의 부흥 가능성은 완전히 사라졌다. 당시 기사를 보면 이성계가 온건한 입장을 취하자 법을 맡은 형조부터, 핵심 중신들이 모인 도평의사사에, 젊은 관료들이 모인 대간까지 일치단결해서 왕씨를 발본색원해 주멸해야 한다는 목소리를 높였는데 공신들의 위기감이 젊은 신료들에게까지 공유된 것으로 여겨진다. 개성 왕씨가 공식적으로 지배층(사족)으로 복귀하고 나서도 누구도 고려 부흥이라는 명분을 가지고 준동하지 못하게 되었다. 이는 지난날 [[고구려]], [[백제]], [[발해]], [[신라]]가 왕조가 사라진 지 수백년이 지나서까지 [[고구려부흥운동]], [[백제부흥운동]], [[발해부흥운동]], [[신라부흥운동]]이 일어나 계속 나라를 되살리려 시도했던 것과 다른 모습이었다. 자신들은 고려의 신하로 남고자 한 [[원천석]]과 [[길재]]조차 자신의 자식, 제자들이 조선에서 벼슬살이하는 건 만류하지 않았고 이색의 제자인 권근도 뜻을 꺾고 조선 조정에 합류했으니 돌아가는 분위기를 알만하다. 이 철저한 숙청 덕분에 신생국가 조선은 1차, 2차 왕자의 난과 조사의의 난(태조의 난) 같은 크고 굵직굵직한 위기를 겪고도 단단한 기반을 확립할 수 있었다. 설령 왕씨 본인들이 반란을 일으키더라도 그들은 민심을 얻지 못한 채 고려 부흥에 실패했을 가능성이 높다. 다만 희박하게나마 존재하던 고려 부흥 가능성이 왕씨 몰살로 인해 아예 0%가 되었다는 것에 의의가 있을 것이다. 이성계의 한양 천도는 왕씨 제거와 관련이 있다는 주장이 있는데 관련이 없다는 반박도 있다. 공민왕, 우왕때도 거론되었고 공양왕때도 이성계 측에서 간접적으로 추진하려고 했던 일이었다. [[개경]]은 면적이 좁은데 인구는 과도할 정도로 많았다. 또한 경작지는 적고, 강과 거리가 꽤 있어 수운 활용이 불편해 천도 논의가 꽤 나왔고, 그때마다 수백년 도읍, '풍패지향'이라는 관성으로 버텼다. 공양왕때 이루지 못한건 나라 살림이 어려운데 토목공사가 웬말이냐는 명분을 권신이라도 어쨌든 신하인 이성계가 반박할 명분과 권위가 없었기 때문으로 조선 건국 이후 창업군주의 권위와 새술은 새부대에 라는 명분으로 밀어붙여서야 가능했다. 이성계는 개국 이후 겨우 한 달만에 한양 천도 카드를 꺼내들었고 [[정도전]]을 비롯한 신하들은 처음에 완강히 반대했다. 왕씨를 죽여서 이성계에 대한 민심이 나빠졌다 볼 근거가 없다는 의견도 있다.[* 개성의 역사성은 고려의 수도에만 있지 않다. 개성인들은 자신들의 고향이 고려의 수도라는 점 못지않게 조선 왕실의 어향, 태조가 즉위하고 태종이 성장한 풍패지향이란 점을 진심으로 자랑스러워 했다. 세종 즉위년(1418)에 개성의 태조 잠저에 사당을 짓고 '[[목청전]]'(穆淸殿)이라 이름하여 어진을 봉안했는데 임진왜란 때 소실되자 개성 사람들은 200년이 넘게 요청한 끝에 대한제국 시기인 광무 5년(1901)에 재건하고 태조 이성계의 어진을 봉안했을 정도로 조선의 역사도 중요하게 여겼다.] 태조대 실시된 과거들은 야사와 달리 개국에 반대하던 온건파들까지 슬슬 합류해 합격자 정원 꽉꽉 채워서 성황리에 치러졌고, 태조 3년 조성된 수도 '''한양 인구 상당수는 개성에서 이주시킨 인구였다.''' 그리고 '''무인정사가 끝나고 혼란한 상황에서 정변 세력은 개성 환도를 단행했다.''' 개성은 조선 초기 제2수도로서 재환도 이후에도 세종 20년 개성유후사를 개성유수부로 개편하고 경기감사가 당연직으로 '''2명의 개성 정유수 중 1직을 겸할 정도로''' 개성에 대한 특별대우는 지속되었다.[* 유후사를 유수부로 고친 것은 '''원래 유후는 관직명이지 행정구역 단위명이 아니기 때문'''이었고, '''중국 사례를 상고해보니 제2수도에는 유수부를 두는 게 관례라서''' 유수부를 설치한 것이다. 즉 명칭만 바뀐 것이지 제2수도라는 지위는 똑같다.] 심지어 개성유수는 경관직으로 지위 자체가 8도 감사의 위에 있었기 때문에 여러 지방관직을 거친 뒤에 지방관을 사실상 졸업하는 자리가 바로 개성유수였다. 17세기부터 <개성소외론> 같은 야사가 등장한 이유는 16세기 이후 개성의 위상변화 때문이다. 조선시대 유생들의 수학기관은 절과 학당, 향교 등인데 개성은 수도 한양에서 가까워 접근성이 좋은데다 고려시대부터 수도라 학당도 있고, 공부하러 들어갈 절도 지천에 널려있어 개성문인들은 맘껏 혜택을 누리며 스스로 자부심을 가졌다. 성종과 연산군대에 개성의 유생들이 개성 유생들을 위한 알성시(특별과거)를 열어줄 것을 요청했으나 신료들이 그랬다간 한양 사람들이 개성에 가서 시험친다며 반대한 사례에서 엿보이듯 조선시대 지리관념상으로도 개성은 한양과 같은 권역으로 여겨져서 조정 입장에서 불이익을 주고 말고 할 것도 없었다. 하지만 16세기에 들어 조선의 중앙집권적 행정체계가 완전히 정착하고[* 속현, 소 같은 고려시대의 차별적 행정구역은 조선 개국 후에 바로 사라진게 아니라 점진적으로 사라지다가 16세기에 가서 완전히 사라졌다.] 한양의 절대적 우위가 고착화되어 개성과 한양의 격차는 비교할 수 없게 커졌고, 반면 사화와 당쟁으로 중앙의 관인층이 각 지방으로 흩어져 서원을 통한 자체적인 교육과 전승 체계를 마련하면서 중앙에 비해 낙후되었던 지방의 학문적 역량이 향상되면서 개성과 타 지방의 차이는 줄어들었다. 그러다가 임진왜란이란 미증유의 재난으로 도시가 쑥밭이 되면서 학문교육 시설도 재가 되어버리니 개성의 이점은 완전히 사라졌다. [[서경덕]](徐敬德), 차천로(車天輅), 최립(崔岦) 같은 걸출한 문인들을 배출한 15~16세기의 영예는 끊어져 버렸다. 과거 누려온 메리트가 모두 사라지고 자부심을 드높일 문인들도 배출되지 않은 상실감과 박탈감, 피해의식이 <개성소외론>이란 가공의 역사를 만들어내기에 이른 것이다. 개성의 떨어진 자존감은 18세기에 노론 낙론 종장들에게서 수학한 유학자들이 속속 등장하고 나서야 회복된다. 그리고 상업은 소외받아 융성한 게 아니라 500년간 수도로 기능하며 원래 상업 종사자가 많던 도시였다. 고려 태조 왕건부터가 예성강 하구를 기점으로 무역을 해 부를 쌓은 해상 세력 출신이다. 그리고 조선시대 4대문안 시전 상인의 유래가 한양으로 강제 이주된 개성 상인이었다는 얘기가 있을 정도다. [[연려실기술]]을 비롯한 야사에서는 왕씨 몰살 직후 이성계의 꿈에 고려 태조인 왕건이 나타나서 "내가 삼한을 통일하고 백성들을 편안히 한 공이 있거늘 어찌 내 후손들을 해치느냐? 너희 또한 대가를 치룰 것이다."라고 경고했다는 이야기가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